영화 [퍼펙트게임] 은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라이벌 최동원, 선동열 선수의 실제 경기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라이벌 등장, 전설이 된 3번째 선발 맞대결 경기와 고인이 된 최동원 선수의 일생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감동적인 경기 속으로 함께 떠나 보시죠.
프로야구 최고의 라이벌 등장
1981년 세계대륙간컵 결승전 캐나다와의 경기, 승부를 마무리 짓기 위해 최동원이 등판하고 완벽한 투구로 팀을 구해내며 우승을 차지합니다. 우승컵을 가지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공항은 축하 인사로 떠들썩해지고 많은 관심은 최동원에게 쏠리게 됩니다. 좋은 활약을 펼친 선동열은 당시 새내기로 기자의 질문에 최동원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히게 됩니다. 시간은 흘러 선동열의 기량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성장하게 됩니다. 1986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님 선동열이 됩니다. 최동원은 수상자인 선동열을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지만, 여론은 최동원과 선동열을 라이벌 관계로 만들어 서로를 비교하게 됩니다. 그다음 해인 1987년 선동열이 속한 해태는 팀의 좋은 성적과 함께 최고의 스타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반면 롯데의 에이스 최동원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팀 분위기까지 악화되어 락커룸에서 동료와의 갈등으로 몸다툼까지 벌어지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승승장구하던 선동열과 달리 예전과 다르게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최동원은 마음이 좋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1980년대 프로야구 최고의 라이벌이며 그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통산 선발 맞대결 성적은 1승 1패로 누가 우위라도 말하지 못하는 박빙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발 맞대결 경기
이렇게 두 라이벌의 대결은 구단과 팬들의 최고 관심사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까지 그들의 라이벌 경기를 여론을 조성하는데 이용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비로 인해 연속적으로 경기가 연기되게 되고, 가장 열성적인 팬들이 많은 부산에서 마침내 에이스의 맞대결이 성사되게 됩니다.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최동원은 어깨 통증에도 진통제 투혼을 각오하고, 동열도 맞대결의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동열의 감독은 동열에게 한국 야구의 최고의 투수는 동원이며, 동열이 여러 면에서 동원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말해주며 동원의 승부욕을 자극하게 됩니다. 그 시각 무명 포수 박만수가 혼자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동열은 같이 훈련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눈 게 됩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만수는 야구를 그만두라는 부인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선발 맞대결을 앞둔 상황에서 기자가 동원에게 기량이 예전과 같지 않다며 도발하자 더욱더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동열도 자신의 우상을 이기겠다고 마음을 먹고 연습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드디어 1987년 5월 16일 결전의 날이 밝고 경기가 시작됩니다. 150km가 넘는 강속구와 변화구로 경기 초반은 아주 팽팽하게 진행됩니다. 해태가 먼저 1점을 내어 근소하게 앞서 가게 되고 휴식시간에 화장실에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싸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동원의 몸에 맞는 공으로 벤치 클리어링까지 일어나며 경기는 더욱 과열되게 됩니다. 6회 말 반격을 노리는 롯데는 적시타로 한꺼번에 2번을 내 단번에 경기를 뒤집게 됩니다, 이후 두 선수의 역투는 이어지고 8회 해태는 포수를 무명의 선수인 박만수로 교체하게 됩니다, 9회 프로야구 통산 첫 타석에 들어선 박만수 선수는 동원의 공에 전혀 대체하지 못하게 됩니다. 볼 카운트가 몰린 가운데 그는 극적으로 동점을 만드는 홈런을 치게 되고 경기는 연장전에 접어들게 됩니다. 동원은 어깨 통증을, 동열은 손 끝 물집이 터져 피까지 나는 상황에서도 상대에게 승리를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의지를 알게 된 동료 선수들은 둘의 승리를 위해 전의를 불태우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15회까지 승부를 내지 못하고 최고의 라이벌 경기는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나게 됩니다, 동원은 209개, 동열은 232개의 투구 수로 15회 완투를 기록하게 됩니다. 선발 투수 투구 수가 100 정도로 관리하는 현대야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투구 수입니다.
최동원 선수의 일생
전무후무한 기록인 한국시리즈 4승을 달성한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은 1958년 경남 남해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983년 롯데자이언츠에 지명되었으며, 역동적인 투구폼과 공격적인 투구 성향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됩니다. 롯데자이언츠의 에이스로 많은 경기와 많은 이닝을 투구하여 무쇠팔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시리즈 전 경기의 승리 투수로 활약하며 1984년 롯데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게 됩니다. 롯데의 레전드로 남을 것 같던 그는 선수들의 열악한 운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선수협회 구성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돌연 1989년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됩니다, 많은 투구 이닝으로 혹사되어 부상을 달고 살았으며 구속이 많이 느려져 결국 1990년도 은퇴를 하게 됩니다. 은퇴 이후 한화에서 코치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많은 팬들은 그가 롯데자이언츠로 돌아오길 바랐으나 결국 성사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최동원은 대장암을 진단 받아 치료를 이어 가던 중에도 모교의 후배들과의 친선 경기에 등장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2011년 9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생전 마지막 꿈은 롯데자이언츠의 감독을 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구단과의 좋지 않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야구의 레전드이자 롯데자이언츠의 레전드였던 불멸의 무쇠팔 최동원에 대한 추모의 물결은 계속 되었으며,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롯데자이언츠는 사후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 하였습니다. 지금도 부산 사직구장 입구에 그의 동상에 많은 사람들이 추모하고 있으며 전광판 아래 11번을 보고 그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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